얼마 전에 드디어 냉장고 정리를 해치웠다. 자취의 역사는 길었지만, 냉장고 정리는 좀처럼 익숙지 않아 미루고 있던 터였다. 조그만 원룸형 냉장고 곳곳에 엄마의 흔적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부산 집에 다녀올 때마다 싸 들고 온 각종 식재료. 용기에는 내용물을 쉽게 알 수 있도록 엄마가 직접 쓴 이름표가 붙어 있었다. 엄마 손 글씨는 워낙 개성이 강하고 독특해서 절대 다른 사람과 헷갈릴 수 없다. 의상실 간판 디자인으로 쓰기도 했는데, 어쩐지 본인은 악필이라 여겨도 나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엄마 글씨를 참 좋아했다.
매운 고춧가루. 들기름. 단촛물.
단촛물은 다 쓴 지 한참 지났지만 버릴 수 없었다. 글씨가 번지지 않도록 이름표 주위만 살살 씻어 그대로 말려두었다. 냉장고 안쪽 구석에서는 얼마나 있었던 건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잼을 발견했다. 겉이 멀쩡해 살짝 맛을 보니 묵직한 단맛이 났다. 오디잼이었다. 엄마는 남은 과일을 꼭 잼이나 청으로 만들었다. 언젠가 친구가 가져다준 오디가 너무 많이 남아 무르기 전에 잼으로 만들었다던 엄마가 불현듯 떠올랐다.
요리를 보통 삶이라 보면, 절임을 만드는 건 시간을 지연시키는 일,
금방 상하는 과일을 거의 무한하게 유지시키는 기술이다.
(…) 그렇게 무르고 수상쩍은 절임을 만들었다.
그 검은색 덩어리를 유리병에 옮겨 담으면
겨울에도 여름의 맛을 느낄 수 있었다.
리베카 솔닛「멀고도 가까운」김현우 옮김 p125~128 반비 2016
잘 먹지도 않는 잼을 굳이 챙겨온 거였다. 엄마가 공을 많이 들였다고 가져가서 먹어보라는데 거절할 수 없었다. 그런 식으로 마지못해 부산에서 가져온 음식이 아직도 냉장고에 있다. 보통 오래된 음식은 엄마가 준 거라도 눈 딱 감고 버렸는데 이번에는 그럴 수 없었다. 좀 야무지게 제때 챙겨 먹을걸. 약 부작용으로 속이 메스꺼워 한동안 부엌 근처에도 가지 못했던 엄마였는데. 그래도 잼 만들 때는 몸이 좀 괜찮았구나 싶었다. 오디 꼭지를 일일이 땄을 엄마 손을 떠올리며 새삼 부엌일은 몸으로 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몸은 사라졌는데 엄마 손으로 만든 오디잼이 냉장고에 남아 있다. 변함없는 맛이 신기하고 쓸쓸했다.
2022년 우연히 알게 된 홍승은 작가의 글방을 계기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너의 몸’이라는 주제로 다양한 몸에 대한 이야기를 써보자는 모임 소개 글에 끌려 등록했다. 엄마가 폐암 진단을 받고 1년이 넘어가던 무렵이었다. 엄마를 주제로 써야겠다 마음먹고 신청한 건 아니었지만 대부분 엄마에 관한 글이 되었다. 짧게는 6주, 길게는 9주 동안 진행되는 일정을 따라가다 보니 꽤 많은 글이 쌓였다. 마지막으로 함께한 글방은 호스피스 입원 직전에 시작해 장례식을 치르고 끝이 났다.
엄마에 관한 글을 책으로 만들기 위해 나는 여전히 쓰고 있다. 엄마가 떠난 지 1년이 채 지나지 않았다. 계속 쓰는 일이 힘들지 않냐는 친구의 걱정에 나는 쓸 수라도 있어 다행이라고 답했다. 쓰지 않고 엄마 없는 현실을 살아가는 방법을 난 아직 모른다.
엄마를 쓰지 않을 수 없었던 시간을 글방과 함께 통과했다. 그사이 엄마는 투병을 끝내고 비로소 죽음으로, 삶으로부터 해방되었다. 엄마 생전에 썼던 글을 다시 천천히 읽어보았다. 살아있는 엄마 곁에 있는 그때의 내가 아득하다. 지금의 나는 글 속의 나를 잘 알지만,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를 결코 상상할 수 없었다. 엄마 없는 삶이 현실이라는 게 여전히 거짓말 같다. 그래서 부러웠다. 무너지는 마음으로 쓴 글조차, 살아있는 엄마 곁에서 썼을 그때의 내가 사무치게 부러웠다.
글 속 엄마와 나는 마치 절임처럼 유리병에 담겨 있는 것 같다. 다시 맛볼 수 없는 그때의 우리를 글 안에 절여둔 내가 어쩐지 대견하다. 엄마 곁에서 보낸 시간이 익숙한 단맛을 내며 입안에 퍼진다. 하나씩 꼭지를 딴 오디를 설탕을 녹인 물에 졸이며, 불 앞을 지켰을 엄마의 시간. 이젠 세상에 없는, 그러나 부패하지 않을 시간을 나 혼자 음미한다.
언제부턴가 사람을 책으로 상상해보는 습관이 생겼다. 사람이 한 권의 책이라면 그 사람의 삶을 내 손으로 펼쳐보는 상상. 적당한 조명 아래 편안한 책상에 앉아서 첫 페이지부터 읽기 시작한다. 문장과 문장 사이에 미처 단어로 태어나지 못한 순간까지 상상하며 책을, 삶을, 사람을 읽는다. 사람을 쓰는 일은 어쩌면 가장 성실한 사랑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