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제품 가게로 전략을 바꾼 건 잘한 일이었다. 브루클린 숙소 근처에 있는 가게를 몇 군데나 돌았지만 내 치수에 맞는 건 찾을 수 없었다. 오히려 중고를 파는 구제 가게를 가보는 게 어떻겠냐는 엄마의 제안에 바로 구글 맵을 켜서 검색을 시작했다. 사이즈만 맞으면 중고가 오히려 편할 거라는 엄마 말에 나는 쉽게 설득됐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잡화를 파는 구제 가게가 있었다. 10월, 다소 흐린 날씨의 뉴욕이었다. 가게를 향해 걸으면서 이곳에 엄마와 같이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독일에서 제대 후, 춤을 추고 싶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다짜고짜 뉴욕으로 건너온 나도 나지만, 그런 아들을 만나러 그토록 힘들어하는 비행기를 열세 시간 넘게 타고 뉴욕까지 날아온 엄마도 엄마였다. 갑작스러운 제대였고, 그토록 오고 싶었던 뉴욕에 왔고, 엄마까지 옆에 있다는 게, 모든 게 선물 같았다. 무엇보다 엄마와 내 가 사랑해 마지않는 구제 쇼핑을 남포동이 아니라 브루클린에서 하고 있다니.
가게는 작지 않았다. 의류부터 액세서리, 가방 등 종류 별로 없는 게 없었고, 한쪽 구석에 신발 코너가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쇼핑에 있어서는 임무를 수행하는 스나이퍼 뺨치는 집중력을 발휘하는 엄마였다. 엄마는 신발 하나하나를 살펴보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한쪽에서 어설프게 뒤적거리고 있는 나를 불렀다.
“아들, 이게 앞에 지퍼도 있어가, 네 발 폭 넓은 것도 카바되겠는데? 함 신어봐라.”
전문가의 분부대로 나는 바로 양말을 벗었다. 왠지 주위 사람들 눈치가 보였지만 여기는 뉴욕이니까 생각하며 용기를 냈다. 양쪽 모두 신고 앞에 지퍼까지 올렸더니 내 발 크기에 딱 맞았다.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한쪽에 마련된 거울 앞에 섰다.
쭈뼛거리고 어색해하는 나와는 달리 엄마는 확신의 끄덕임으로 외쳤다. “딱이네!” 그렇게 우리는 뉴욕 브루클린 구제 가게에서 하이힐 쇼핑에 성공했다. 발등 쪽에 지퍼가 달린 265 사이즈의 검은색 토오픈 하이힐. 인생 첫 하이힐이었다. 일주일 뒤, 나는 엄마가 골라준 하이힐을 신고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힐댄스 수업을 듣고 있었다.
엄마는 남달랐다. 어릴 때부터 내게 해준 여러 조언(‘남자라고 색깔 입는 걸 두려워하면 안 된다’ ‘피부에 편한 소재를 잘 골라 입어야 한다’ ‘좋은 원단과 디자인의 옷은 비싸도 투자할 가치가 있다’)들이 쌓여 지금의 내 취향에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BB크림이 유행하기 시작하고 화장에 관심을 보일 때 본인이 쓰지 않는 파운데이션을 권해준다거나, 홈쇼핑에서 때마다 유행하는 제품을 살 때 내 것도 꼭 하나씩 챙겨주었다(그 유명한 ‘견미리 팩트’를 엄마에게 선물 받아본 아들이 바로 나다). 엄마를 생각하면 ‘편견 없다’ ‘개방적이다’ ‘열려 있다’ 등의 표현이 상투적으로 느껴진다. 엄마는 취향에 관해 누구보다 넓고 다채로운 시각을 가졌고, 동시에 어울리는 걸 골라낼 줄 아는 안목과 적극적으로 권할 줄 아는 소신 있는 사람이었다. 성별은 가뿐히 뛰어넘는 ‘취향력’을 자식을 위해서 한껏 발휘 한 엄마는 내 인생 퍼스널 쇼퍼였다.
엄마는 내가 입고 걸칠 것들을 자주 사놓았다. 오랜 만에 집에 들를 때면 내 방 침대 위에 다양한 아이템이 기다리고 있었다. 국제시장 구제 가게에서 ‘기가 맥히게’ 발견한 깔끔한 디자인의 가방부터 원가 세일을 하는 아울렛 매장에 들렀다가 평소에는 기십만 원을 주고 사야 하는데 ‘딱 니 사이즈가 남아서 건진’ 고급 원단의 재킷, 옷장을 정리하다 지난번에 산 내 셔츠랑 잘 어울릴 것 같아 선뜻 내놓은 엄마 스카프까지. 성인이 된 이후 엄마가 사준 옷을 입는 일은 왠지 자연스럽지 않지만, 운 좋게도 그 엄마가 의상 디자이너가 업이었던 사람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엄마는 타고난 감각의 소유자였던 반면, 애석하게도 나는 아니었다. 대학에 입학하고 나도 드디어 취향이라는 것이 생기기 시작할 즈음 홍대 옷 가게에 간 적이 있다. 당시 대안 문화에 꽂혀 있던 친구를 따라 찾은 곳이 었다. 사장님의 화려한 영업 멘트와 옆에서 부추기는 친구 때문에 이것저것 입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고, 정신 차려보니 상하의 세트를 사 들고는 가게를 나섰다. 옷을 직접 사본 경험도 거의 없었고, 나름 새로운 스타일을 해보고 싶어 큰맘 먹고 지른 터였다. 엄마가 내가 산 옷을 어떻게 생각할지 너무 궁금했다.
당당히 세트로 빼입고 집에 등장한 나를 보더니 엄마는 말을 잇지 못했다. 인사도 건너뛴 침묵이 흘렀고, 말을 고르다 실패하고 고개를 내저었던 엄마. 두말할 것 없이 당장 갖다 버리라고 말했다. 엄마가 이렇게 단호한 사람이었던가. 지금까지도 미스터리인 것은, 분명 매장에서 입었을 때는 히피와 보헤미안 감성이 충만한 이국적인 에스닉 룩이었는데, 집에서 보니 세상 후줄근했다. 엄마 표현을 빌리자면 “거적때기 같은 천 쪼가리”를 내가 입고 서 있는 게 아닌가. 엄마는 얼마 주고 샀냐 물었고, 나는 대답 대신 말끝을 흐렸다. 엄마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웃으면서, 많이 입어보고 실패도 해봐야 뭐가 어울리는지 알 수 있다는 조언을 더했다. 그날 이후, 나는 그 옷을 두 번 다시 입지 않았지만 후회는 없었다.
혹독한 신고식을 치르고 우리가 공유한 ‘쇼핑의 역사’는 세월과 함께 쌓여갔다.
“역시 니가 내 닮아가 보는 눈이 있네.”
알게 모르게 내게도 엄마의 취향이 스며들어 호평을 듣는 날도 늘었다. 좋은 점수를 얻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하는데 가성비는 제일 중요한 덕목이었다. 엄마의 취향 저격일 게 분명한 확신의 아이템을 저렴하게 구매한 날에는 무조건 엄마에게 자랑했다. 엄마도 질세라 전화로라도 꼭 나에게 자랑을 했고 늘 마지막 질문은 익살스러운 톤으로 “얼마 주고 샀게~~~” 를 시전했다. 나는 예상하는 가격보다는 조금 높게 답했고, 그보다 더 가성비 좋게 구매한 사실에 함께 감격함으로써 ‘성공한 쇼핑’의 피날레를 장식했다.
“이야, 니 이제 엄마 없어도 되겠네.”
칭찬인 줄 알면서도 엄마가 이렇게 말할 때면 왠지 슬펐다. 처음엔 엄마 없으면 안 된다고 배울 게 아직 많다고 받아쳤지만, 엄마가 아프고 나서는 대답이 달라졌다.
“엄마가 잘 키워놔서 이 정도 한다 아이가. 그러니까 엄마 걱정할 거 하나도 없다.”
엄마의 타고난 감각은 늘 내게 선망의 대상이자 기준이었기에 쉽게 도달할 수 없을 것이다. 대신 취향도 유산이라면 내게 잘 어울리는 것을 고르는 능력은 엄마가 남긴 것이리라. 지금도 신발장 한쪽에 뉴욕에서 산 하이힐 한 켤레가 있다. 지퍼가 살짝 낡았지만, 취향은 바래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