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엄마가 영상 속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긴장하지 않은 척하지만 평소보다 신경 쓴 화장과 머리가 눈에 들어온다. 익숙한 거실 소파에 앉은 엄마에게 질문을 던지는 아현의 목소리가 들린다. 엄마는 성심성의껏 대답한다. 내 얘기다. 한 시간 분량의 질문도, 대답도 전부 나에 관한 인터뷰다. 얼마 전, 영화에 쓰이지 못하고 파일로 남아 있는 영상을 아현에게 건네받았다.
영화 「퀴어 마이 프렌즈」는 아현이 감독인 다큐멘터리다. 대학교 선후배로 만났지만 내가 한국을 떠나고 난 뒤에야 아현과 더 가까워졌다. 우리는 만나면 대화가 끊이지 않았다. 정체성을 고민하며 성실하게 방황하는 나를 아현은 늘 궁금해했다. 어느 날 본격적으로 카메라를 들고 나타난 아현은 나를 찍기 시작했다. 기꺼이 친구의 습작이 되고자 가벼운 마음으로 참여했는데 정신 차려 보니 나는 아현의 영화 주인공이 되어 있었다. 제작기간 7년을 거친, 우리의 지난한 20대가 고스란히 담긴 영화는 2023년에 정식 개봉하면서 긴 여정의 막을 내렸다.
영화에 엄마는 등장하지 않는다. 영화 대부분은 독일에서 제대 후 패잔병처럼 한국으로 돌아온 시절을 담았다. 부산으로 돌아가는 건 뒷걸음질하는 것 같아서, 벌이도 의무도 없는 서울에 거처를 구했다. 계속 떠나고 또 떠나기를 반복하다 결국 돌아온 내가 실패처럼 느껴졌다. 우울증과 싸우며 절망을 곱씹던 그때의 내가 화면을 가득 채운다. 화면으로 들어가 소리치고 싶다. 시간이 얼마 없어. 울 거면 엄마 품에서 울어.
퀴어에 관한 이야기지만 결국 우정을 말하는 영화.
어느 관객이 영화를 보고 남겨준 평처럼 이 영화는 내게 한 가지 사실을 분명히 증언한다. 혼자라고 굳게 믿었던 시절에 결코 혼자가 아니었다는 것. 가장 가까운 곳에서 나를 버티게 해주는 존재가 있었다. 기대는 법을 몰라 서툴고 어색했던 그때의 아현과 나는, 완성된 영화를 보고서야 우리가 서로에게 얼마나 의지하고 있었는지 알았다. 영화에 직접 등장하진 않지만, 나는 장면 곳곳에 엄마가 있다는 걸 안다. 영화가 끝나고야 가능했던 깨달음처럼, 엄마의 엔딩 크레디트가 다 올라가고 나서야 엄마가 늘 가까이에 있었다는 걸 뒤늦게 알아차린다.
엄마가 준 사랑은 우정이라는 단어와 섞어도 낯설지 않다. 내 삶에 우정은 엄마를 경유해 더 깊어졌다. 나는 친구들에게 엄마 이야기를 꺼내는 게 자연스러운 사람이었다. 엄마는 내 친한 친구들을 자기 친구처럼 오래 알고 지냈다. 친구를 소개해주면 엄마는 얼마 지나지 않아 친구 이름 앞에 ‘우리’를 붙여 불렀다.
식당을 빌려 친구들과 함께 엄마 생일을 축하했고, 일박을 작정하고 엄마 집에 전부 모이면 배가 터지기 직전까지 엄마는 음식을 해주었다. 어느 겨울에는 손이 큰 엄마가 대방어 한 마리를 통째로 주문한 일도 있었다. 입이 무려 여덟이었지만 다 해치우기에는 역부족이었던 어마어마한 양을 떠올리자면 아직도 배가 더부룩하다. 내가 한국을 떠났을 때도 친구들은 부산 갈 일이 생기면 엄마 집에서 자고 갔다. 똑같이 아들 하나인 막내 이모는 내 친구들 이름을 줄줄이 꿰고 있는 언니를 신기해했다.
다큐 촬영이 시작되고 아현은 카메라를 들고 엄마 집으로 자주 찾아왔다. 촬영을 계기로 둘은 가까워졌고 엄마는 아현을 유독 예뻐했다.
“와 내라고 니같이 예쁜 며느리를 안 바랐겠노.”
아현이 엄마를 인터뷰하는 중이었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엄마의 진심을 엿들은 기분이었다. 나의 행복이 최우선이라고 말하던 엄마는 어쩐지 아현 앞에서는, 농담으로라도 내게는 절대 보이지 않았을 자신의 욕망을 드러냈다. 엄마가 기껏 꺼내놓은 보통의 행복이 내가 해줄 수 없는 일이라 미안했지만, 아현에게라도 엄마가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돌아보면 친구로서 아현이 얼마나 불편했을까 싶지만, 카메라를 들고 내가 살피지 못하는 곳까지 비추는 그때 아현의 시선이 나는 참 고마웠다.
투병을 시작한 엄마 곁으로 돌아온 지 1년쯤 지났을 때, 아현에게도 갑작스럽게 암이 찾아왔다. 오랜 짐이었던 영화를 끝내고 일상을 되찾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소식을 들은 엄마는 많이 속상해했다. 아현의 삶에 갑자기 끼어든 암이 친구들 모두에게 가슴 아픈 일이었지만, 내리사랑으로 아현을 특히 애정했던 엄마 마음은 또 달랐을 거라 짐작한다.
엄마는 아현에게 항암 동지를 자처했다. 둘이서 주고받는 연락이 늘었다. 항암 시작 전에 미리 눈썹 문신을 할지 말지, 머리카락이 다시 자랄 때까지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지. 아현이 조언을 구하면 엄마는 최선을 다해 답했다. “내는 다 살았지만 아현이 니는 얘기가 다르데이~ 아직 살날이 짱짱하니까 무조건 잘 묵어야 된다!”며 엄마는 용돈을 부치기도 했다. 엄마는 극구 사양하는 아현의 거절을 거절했다. 돈보다 큰마음을 헤아렸던 아현은 맛있는 식사를 사 먹고 엄마에게 사진을 찍어 보내며 답했다.
아현과 엄마의 투병 동안, 나는 내 몸 아픈 것처럼 둘을 공감해줄 수 없는 순간마다 무기력했고 참 미안했다. 그래서 엄마에게 아현이, 아현에게 엄마가 있어서 나는 두 사람이 참 고마웠다. 주는 마음, 받는 마음, 지켜보는 마음까지. 모두에게 힘이 되는 시절이었다.
엄마가 항암 중단을 결정한 뒤 아현과 친구들은 부산 집을 찾았다. 통증 때문에 예전처럼 식사를 챙겨주지 못해 아쉬워했지만, 오랜만에 본 친구들을 엄마는 있는 힘껏 반겼다. 기력은 사라졌지만 주고 싶은 마음은 여전했다. 엄마는 아껴둔 원두를 꺼내 지퍼백에 가득 담아 챙겨주며 말했다.
“느그 진짜, 이런 친구 관계가 얼마나 소중한지 시간 지날수록 더 알게 될 끼다.”
영화 촬영을 시작한 10년 전에도 똑같이 해준 말이었다. 이것은 엄마의 마지막 인사가 되었다.
장례식장에 우리는 하나도 빠짐없이 모였다. 장례 기간은 친구들과 함께 엄마를 배웅하는 짧은 여행 같았다. 병원에서부터 화장터까지, 장례 처음부터 끝까지 친구들이 함께 해주었다. 마지막 날, 화장이 끝나고 내가 유골함을 안고 나서는 순간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울음이 터졌다. 엄마 말처럼 더욱 소중해진 우리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한참을 울었다. 역시 엄마 말은 틀리지 않았다.
내가 아는 슬픔은 이제 깊고 선명하다. 죽은 엄마는 내 안에서 선명한 슬픔이 되었고, 이 슬픔을 친구들이 알아보고 함께 돌봐준다. 혼자일 때도, 함께일 때도 슬픔을 살아내는 일을 참지 않는다. 친구들 이름 앞에 ‘우리’라는 단어를 즐겨 붙이던 엄마 덕분에, 우리는 더 깊은 우리가 되었다. 엄마가 엄마도 모르게 선물해준 우리는 엄마를 함께 추억한다. 나는 기꺼이 치대고, 기대어, 엄마 없는 삶을 살아낸다. |